학교는 “게이 같다”가 흔한 놀림거리가 되는 공간이다. 게이로 커밍아웃했던 래리에게 괴롭힘과 따돌림은 이미 일상이었다. 그러나 래리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젠더정체성을 탐색하고 드러내기에 이른다.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은 더 심해졌지만, 그/녀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귀걸이를 하고 학교에 가는 일은 ‘래리’가 아닌 ‘래티샤’와 ‘라토냐’로 살기 위해 중요해 보였다. 자기 옷차림과 행동을 통제하려는 교사들 앞에서, 래리는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실천으로 맞섰다. 그런데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래리가 좋아하던 브랜든에게 데이트신청을 하자 친구들은 브랜든마저 놀려댔다. 모욕감을 느낀 브랜든은 래리의 머리에 두 발의 총을 쏘았고, 래리는 이틀 뒤 발렌타인데이에 사망했다.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과 브랜든에 대한 재판을 전후로 교사와 배심원, 변호인, 그리고 유력 언론사들은 래리의 “위험할 만큼 주목을 끄는” 젠더 표현에 초점을 맞춘다. 교사들은 래리가 ‘남성’임에도 과장된 여성적 꾸밈과 행동을 드러냈으며 이것이 브랜든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했는지 증언한다. 배심원들은 래리의 행동으로 인해 브랜든이 “게이공포”에 빠졌다는 식의 변론에 공감하며 그를 동정하고, 심지어 무고하다고 여긴다. 언론은 결국 성소수자 혐오로 인한 살인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개인의 특이하고 반사회적인 성향이 부추긴 살인사건으로 희석시키려 한다.
래리의 죽음과 브랜든의 재판을 둘러싼 일련의 반응들이 곧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를 가능케 하는 사회의 단면이다. 혐오범죄는 이름붙이는 일만도 여전히 논란거리가 된다. 래리가 ‘헛된’ 죽음에 이르도록, 동성애자를 놀림거리로 삼고 트랜스젠더의 삶을 모욕하게끔 만드는 공간은 누구에 의해서 구성되고 유지되는가? 학교는 래리를 지지했던 교사를 해고했고, 래리를 추모하는 나무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래리는 ‘별종’이 아니다. 브랜든이 ‘악마’인 것도 아니다. 이들의 성장배경은 학교 안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절실했으리라는 점을 말해줄 뿐, 어떻게 성적지향이나 젠더정체성이 살인의 이유가 되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마르타 커닝햄 감독은 사건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을 그저 목격하게 해주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서 래리의 죽음에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법정에 서야 할 대상은 차이와 관용을 가르치기에는 이미 너무도 불관용한 어른들이다. 두 어린 학생의 삶을 망가뜨리고도 시치미 떼고 안타까워만 하는 이 사회다.
래리가 죽고 난 이듬해에, 한국에서는 한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던 청소년이 동성애자로 소문이 나면서 괴롭힘을 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소수자 혐오와 이로 인한 죽음은 우리에게도 너무 가까이에 있지만, 혐오는 여전히 어쩌지 못하는 일처럼 남아있다. <발렌타인 로드>는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혐오범죄가 먼저 제대로 말해지고 기억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동성애자였을까, 트랜스젠더 여성이었을까? 이들의 삶과 자기표현, 그리고 행복에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까? 이들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어갔나? 이들이 지금까지 단지 살아있기라도 하기위해, 우리 사회에 무엇이 필요했을까? 질문을 던져보자.
야릉(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