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바스티안>

인권해설

트랜스젠더는 바로 당신이 답하길 바라/보고 있다

전 흔히들 트랜스젠더 인권에 관하여 논할 때 나타나는 어떤 상상적인 구도에 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트랜스젠더(또는 그 옆에 서 있는 트랜스젠더 인권 옹호자들)가 답하길 바라/보고 서 있는 구도. 이해하기엔 낯설고 불쾌하고 두려운 모습-말하자면 두껍고 어색한 화장 따위-으로 서 있는, 어쩌다 마주친 트랜스젠더를 응시하는 구도 말입니다. 그 구도 속에서 트랜스젠더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대체 왜 그런 삶을 선택했을지, 자신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지, 남성이나 여성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는 알고 저러는지 관해 답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럴 때 왠지 우물쭈물 하는 트랜스젠더. 답이라고 해봐야 모순에 불과한 답답한 소리만 내놓는 트랜스젠더. 그런 주제 자신이 남성/여성이라고 ‘주장’하며 화를 내고 찡찡대는 억지스러운 트랜스젠더들. 그러니 그들이 ‘주장’하는 권리라고 할 것들이 과연 ‘예상될 수 있는 문제’(예컨대 화장실 안전 문제 따위)를 떠안아야 할 만큼 보장 돼 마땅할 것일지… 트랜스젠더는 허상이 아닐지.

그러나 트랜스젠더가 인터넷 커뮤니티가 아니고서야 현실에서 이런 구도 속에서 다른 이들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그렇게 흔하진 않습니다. 앞선 구도가 불쾌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 구도가 성립되기 위해선 하나의 마주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로서, 다른 이들과 사회적 관계에서 부대낄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런 상상적인 구도를 전제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이러저러한 혐오적인 밈 따위를 내놓는 사람들에게 제가 어처구니 없음을 느끼는 지점은 바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저런 대화를 나누려면 우선 트랜스젠더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트랜스젠더가 학교에, 일터에, 길거리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여유와 함께 충분히 존재하는지, 존재할 수 있는지? 저는 그래서인지 “우리 곁에 트랜스젠더가 있(을 수도)다”는 말이 텅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말그대로(인구 비율이 0.25퍼센트라는 점을 보더라도) 우연적인 확률로 트랜스젠더‘인’ 사람이 불특정 장소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가 ‘트랜스젠더’로, 다른 사람과 충분한 소통을 가질 수 있을만큼 ‘곁에’ 있을 가능성… 트랜스젠더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는 장소를 놓쳐야 했던, 말하기를 멈춰야 했던-이를테면 학업, 경력, 진로, 가족과의 관계를 놓아버려야만 했던 저, 그리고 수많은 트랜스젠더의 역사-사람들을 떠올릴 때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트랜스젠더들이 말하기를, 어떤 장소에 있기를 단념하고만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과 ‘트랜스젠더’로서 마주치려는 계기를 만들고자 치열하게 말하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그 몸짓과 말을 너무나 쉽게 흘려보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즉 저는 앞에서 말한 경우처럼 트랜스젠더만이 질문 받는 것이 아닌, 트랜스젠더도 어떤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로선 변희수 하사와 숙명여대 A, 그렇게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청소년기부터 “너무 (어려서) 헷갈리는 것이다”라는 부모나 사회의 애썬 무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과 성별과 미래와 욕망과 삶을 말하고 새기려는 트랜스젠더들… 부모에게, 의사에게, 주변인에게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그리고 그에 맞춰 자신의 삶을 조직하기 위해, 이를 위한 단 한 번의 분명한 마주침을 위해, 얼마나 많은 트랜스젠더(청소년)들이 그 긴 고립의 시간동안 말과 욕망을 벼려내야 하는지… 남에 의해 규정되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창출하는 그 한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부모를, 주변인을, 자신을 책임져야 마땅할 그 모든 사람들을 그들이 보지 않더라도(또는 애써 무시하더라도) 얼마나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지, 당신들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제게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해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묻곤 합니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법적인 이러저러한 제도, 인식 등등 그런 흔한 답변을 내놓곤 했지만 왠지 불충분한 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스티안>에서 주인공이 20살이 되는 장면을 보고, 제 20살 때를 곱씹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현 듯 20살을 맞아 처음으로 가졌던 기자회견문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 트랜스젠더들은 (…) 누구보다 뜨거운 의지와 열망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학교를 비롯한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증명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의 짝사랑이었던 당신들이, 그래서 많은 트랜스젠더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겨줬던 당신들이, 교육청이 우리 트랜스젠더들만 당신들에게 우리를 증명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응답할 때입니다. (…) 우리가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들이 없으면 실패할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 당신이 마땅히 우리의 존재와 열망에 응답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물러서지 말고 응답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제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구도를 바꾸는 것. 당신들만이 우리를 응시하고, 답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당신들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도 당신들에게 답을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그 사실을 새기는 것.

한성(청소년 트랜스젠더 인권모임 튤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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