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민주 항쟁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이었으며 전국 34개 시, 4개 군 이상의 지역에서 20여일 동안이나 계속된 범국민 운동이었다. 이러한 대중적 민중 항쟁을 촉발했던 표면적 계기는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4월 13일 전두환 씨의 호헌 조치 발표, 6월 9일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었다. 하지만 6월 민중 항쟁은 86년을 전후로 계속되었던 헌법 개정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군부독재 통치를 거부하는 역사적 흐름속에 있었다.
제5공화국 정권에게 개헌 투쟁은 단순히 ‘헌법을 고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집권을 보장해 준 최고의 법률이 폐지됨으로써, 더 이상의 집권이 국민들에 의해 용인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개헌’ 투쟁은 정권에게도 생명을 건 싸움이었지만,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은 직선제 개헌과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일 집회를 했으며 그러한 과정중에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2월 7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고문 치사 항의 경적 시위가 있었다.
계속되는 투쟁을 공권력으로 막아낸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담화를 자청해 “평화적 정부 이양과 올림픽이라는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의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4·13 호헌 조치는 정권의 국민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고, 2년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던 ‘개헌 논의’를 완전히 무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5월 27일 2천1백93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어 그 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투쟁의 구심 역할을 하는 기구가 탄생하게 된다.
국민운동본부가 이끄는 범국민 투쟁은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선언이 있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투쟁 중에도 독재 정권은 계엄령 발포와 군투입이라는 위협을 계속 가했다. 6월 26일 전국적·전계층 규모의 대항쟁을 전개한 후 드디어 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연내 대통령선거 실시, 언론의 자유 창달, 지방 자치제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끌어내게 된다.
<엄주현/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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