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레드헌트

인권해설

제주, 육지에서 수륙 2만리나 떨어졌고 전시대에는 유배 1번지였던 섬, 중앙의 내국 식민지였던 변방, 그 곳에서 반세기 전에 있었던 4 .3 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금기 그 자체였다.

4 .3은 제주도 무장대가 남한 단독 선거 반대와 조국의 자주 통일, 극우 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에게 공격을 시작한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4 .3은 ‘3 .1 발포 사건’과 이어 벌어진 ‘총파업’이 계기가 되었지만 해방 전후 강제 공출, 6만의 귀환 인구, 경찰의 모리 행위 등 제주 민중들이 수탈당했던 당시 사회 상황과 맞물려있다.

4 .3 항쟁이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에서 비극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1948년 총인구 27만 명의 섬에서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은 5백여 명의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고, 경무부장인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 극우세력은 폭행, 고문, 살해, 방화를 일삼았다.

육지에서 유입된 토벌대는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 방화, 무차별 학살을 자행 ‘북촌 주민 학살 사건’ 등 집단적인 주민학살을 자행했다.

[연표한국현대사](김천영 편저, 한울림, 1985)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에서는 “8만 6천명 살상, 1만 5천호 방화, 7만 8천두의 소와 2만 2천 필의 말 및 2만 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 5천 석, 고구마 4백 2십만 관, 면화 9만 7천 관, 소채 9십만 관이 소각”되었다.

<최은아/ 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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