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지나 경기도에 도착한 북한강 물과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충청도를 지나온 남한강 물이 양평 두물머리 들판에서 하나로 만나 한강이 된다. 두 개의 큰물이 하나로 만나는 곳이라 하여 ‘두물머리’라고 부른다.
두물머리에 유명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유기농업’이다.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업 생산자 단체인 정농회가 창립되고 그 중 한 가족이 두물머리에서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시작하였다. 곳곳에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 마을이 생기고 유기농 단지가 만들어지면서 팔당 두물머리는 수도권 최대의 유기농 생산지가 되었다.
그동안 두물머리 사람들은 비바람이 들이치는 처마를 조금 늘릴 수도 없었고 강아지 한 마리 키우기 위해 마당 한 쪽에 개집을 짓지도 못했다고 한다. 상수원 보호구역에 묶여 있는 7~8개의 중첩규제법은 두물머리 사람들의 생존권과 재산권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경제활동 수단이 농사였다. 온갖 규제에 묶여 희망이 없는 땅으로 낙인 찍혔던 팔당 두물머리가 유기농업 운동으로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2009년 5월,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시작하였다. 북한강, 남한강에 인접해 있는 팔당 두물머리 유기농지의 상당 부분이 4대강 사업에 편입되었다. 유기농업 운동을 이끌었던 농민들은 조합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 사람들을 독려하여 ‘농지보존 친환경농업 사수를 위한 팔당상수원 공동대책위원회’라는 길고 긴 이름의 대책기구를 꾸렸다. 팔당 두물머리 농민들의 아스팔트 농사가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고 농지보존 싸움이 길어지자 농민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4대강 찬성 주민들을 동원한 정부의 회유와 협박은 집요하게 계속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농지보존 싸움의 대오를 이탈하는 농민들은 늘어났고 4대강 찬성, 반대 주민 사이의 갈등의 골도 깊어져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계속 되었고 연행과 벌금이 쌓이면서 농민들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2011년, 남은 곳은 두물머리 8만평 그리고 남은 사람은 두물머리 4가구 밖에 없다. 그러나 농지보존 싸움을 떠난 농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천주교, 시민 사회단체, 생활협동조합원, 대학생, 젊은 활동가들이 그들이다.
2012년 8월, 강제철거 행정대집행을 앞두고 두물머리 문제는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세계 최고의 ‘두물머리 생태학습장’을 만들기로 정부와 농민들이 합의를 보았다. 지금도 두물머리는 ‘생태학습장’이라는 상생의 사회적 합의를 현실화하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서규섭(농사짓고 있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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