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느덧 햇수로 7년째를 넘기고 있는 시리아의 끔찍한 내전 말이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시리아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민중들의 고귀하고도 감동적인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아무리 지금의 현실이 참혹하고 암울할지라도, 1963년과 1966년, 1970년, 이렇게 세 차례의 쿠데타를 거쳐 집권한 알 아사드 가문과 그 측근들에 의해 무려 40년 동안이나 빼앗겨온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스로 되찾겠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그 용기조차 부정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감히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를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잔인했다. 평화적인 시위대를 잔인하게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무장투쟁을 유도해내는 ‘항쟁의 군사화’, 수백 명에 달하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의도적으로 감옥에서 풀어줘 시민군 틈에 뒤섞이게 함으로써 시민항쟁의 대의를 종교적 명분으로 변질시키는 ‘항쟁의 이슬람주의화’,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수니파 주민들과 15%의 시아파 알라위 주민들, 그리고 소수 쿠르드족을 서로 적으로 돌려세우는 ‘항쟁의 종파주의화’, 정권과 같은 종파인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민병대를 내전에 불러들임으로써 반대편 종파의 터키와 걸프국가들을 끌어들이고, 러시아까지 불러들여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군사개입을 이끌어내는 ‘내전의 국제 분쟁화’라는 파멸적인 전략으로 대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리아의 현실은 바로 그러한 전략의 잔인한 결과물이다. 한때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하다가 항쟁의 한복판에 총을 들고 뛰어든 한 청년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홈스는 불타고 있다>(2013)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젊은 시민군들과 주민들은 이제 상당수가 그 자리에 없다. 수만 명에 달하는 정치 수감자 중 하나가 돼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거나, 수십만 명의 실종자 중 한 사람이 됐거나, 50만 명이 넘는 사망자 가운데 하나로 땅에 묻혔거나, 나라 밖으로 탈출한 5백만 난민의 대열에 합류했거나,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더 높은 곳을 찾아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시리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630만 실향민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놈의 지긋지긋한 전쟁은 도무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만 6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오면서 이제는 폭압적인 독재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시민들이라는 구도조차 흐릿해져버린 지 오래다. 정부군과 이슬람국가(IS)가 싸우고, 이슬람국가와 또 다른 이슬람주의 반군이 싸우며, 쿠르드족과 이슬람국가가 또 싸우고, 반군과 반군끼리도 갈라져 싸운다. 선과 악, 적과 우리 편의 경계가 무너지고 지워진 속에서 어쨌든, 싸운다. 그러는 사이 미국과 프랑스, 영국, 러시아, 터키, 이란,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맞는 세력들을 골라 무기를 제공하고, 전쟁을 가르치고, 자금을 대고, 때로는 직접 하늘에서 미사일과 포탄을 쏟아붓는다. 마치 1,700만 시리아 국민들이 모두 죽거나 쫓겨나야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멈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우리는 안다. 오늘날 시리아 민중들이 겪는 이러한 고통에 우리를 비롯한 전 세계 시민들이 많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이 막연히 남의 일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에게 닥친 문제가 됐을 때는 그런 인간적 연민과 연대의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도 우리는 잘 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 <나의 탈출>에서 게이드와 압둘, 이 두 시리아 난민 소년에게 마른 옷과 허기를 채울 음식과 하룻밤의 따뜻한 잠자리를 기꺼이 내준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함도 우리의 얼굴이요, 철책으로 그들을 막아선 채 곤봉을 휘두르고 수용소에 가둔 뒤 내쫓는 국가들의 냉담함도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둘 중 과연 어떤 얼굴을 선택할 것인가?
최재훈 (경계를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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