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기억의 전쟁

인권해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힘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 제주 4·3.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가량인 3만여 명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리고 약 20년 후, 20만여 명의 한국군이 파견된 베트남에서는 제주에서 일어난 일들과 똑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학살, 불타는 집,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강요된 침묵. 

영화에 나오는 1968년 베트남의 모습은 언어만 다를 뿐, 1948년 말 제주의 모습과 닮아있다. 제주 4·3을 겪으며 어떻게든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고군분투했던 제주도민들은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에도 다수 참전했다. 보훈처에 등록된 베트남 전쟁 참전 유공자는 19만 1,436명. 그중 2,297명이 제주도민이다. 

그렇기에 4·3의 기억은 7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제주 4·3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부터 시작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때까지라고 되어 있지만, 제주에서의 4·3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196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그리고 독재정권 시기 전반에 걸친 간첩조작사건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국가폭력의 굴레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왜 이렇게 폭력은 반복되는 것일까.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사 청산’이라는 단어를 국제인권기준에서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기억으로 나눠서 소개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순차적으로 이뤄질 필요는 없지만, 각각의 요소들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사가 청산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 4·3은, 베트남 전쟁은 어디쯤 와 있을까. 진실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처벌되지 않았으며 생존자들에 대한 어떠한 배상도 이뤄지지 않은 역사는 당연히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같은 폭력의 재발을 방지하지도 못한다.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제주 4·3과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져 국경을 넘나드는 고통을 양산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 기억을, 예고 없는 통증으로 떠오르는 상처를, 함께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생존자의 곁에 서서 함께 고통을 기억하고 끔찍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연대의 몸짓만이 이 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백가윤(제주다크투어)

2인권해설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