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구분 없는 공정을 생각해보다
요즘 공정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이다 보니 ‘모두가 승리할 가능성을 공평하게 갖는 공정한 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람이 많다.. <게임의 규칙>은 어떤 면에서 보면 공정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기존의 공정을 흔드는 질문을 한다. 공평한 기회를 가져야 하는 ‘모두’에 포함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9.58초 vs. 10.49초, 484kg vs. 384kg, 2.45m vs. 2.09m”
이 숫자는 육상 100미터 세계 기록, 역도 종합(인상과 용상의 합계) 세계 기록, 높이뛰기 세계 기록에서의 남자부와 여자부의 기록 차이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차이는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말해왔다. 태생적인 남녀 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으며 스포츠에서 성별을 구분하여 경쟁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것을 상식으로, 명백한 과학적 사실로, 그리고 공정함으로 말해왔다. 세부적으로는 남녀의 근육량과 근력, 호르몬의 차이나 체구와 골격의 차이를 분석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스포츠 영역에서 성별 구분은 변할 수 없는, 변해서는 안 될 공정한 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호르몬의 영향은 기록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축적되고 있고, 기록된 숫자들 간 차이는 절대 불변이 아니라 느리고 점진적이지만 점점 간격이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룰이 과연 공정한지 되묻게 한다. 영화 속 맥, 새라, 안드레아의 이야기는 기존의 룰이 가졌던 모순을 확연히 드러낸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엄격한 성별구분이 공정함을 담보하는가?’라는 질문은 현대 스포츠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스포츠 분야에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선수는 계속 존재해왔다. 1970년대 트랜스여성 테니스 선수 르네 리차드는 여자 테니스 협회(WTA)의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US오픈 대회에 출전했다. 종합격투기 선수 펠런 폭스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첫 번째 트랜스여성 선수로서 여성부에서 5승 1패의 전적을 가진 바 있다. 페트리시오 마누엘은 미국의 여성부 아마추어 권투 챔피언이었다가 2018년 남성부로 옮겨 프로로 데뷔한 권투선수였다. 트랜스남성인 크리스 모이저는 2009년부터 여성 선수로서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하다가 2010년 법적/의료적 성별정정을 한 후 전미 철인 3종 경기 남자부에서 1시간 2분 45초의 기록을 세우며 국가대표의 자격을 획득했다. 역사상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미국 육상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베로니카 아이비는 배드민턴에서 사이클로 종목을 변경한 후 2019년 200미터 스프린트 사이클의 연령별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유명한 인터섹스 선수들도 다수 있었다. 1930년대 육상 여성부 100미터 종목에서 세계 기록을 네 차례 경신했던 스텔라 왈시, 1990년대 여성부 유도 선수로 활약하였던 브라질의 에디난시 실바,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800미터 여성부 우승자 캐스터 세메냐 등이 대표적이다. (당연히 언급된 이들이 엘리트 체육에 출전했던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선수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
201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트랜스젠더 선수의 출전 자격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였다. 새 규정에 따라 트랜스젠더 선수 역시 자신의 성별에 따라 올림픽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속 안드레아와 테리가 뛰고 있는 코네티컷주와 유사한 규정이 올림픽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테스토스테론이 공정함을 해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IOC가 규정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1967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염색체 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선수들을 탈의시키고 육안으로 성별 검사를 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IOC의 규정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트랜스남성은 제약 없이 남자부에 출전할 수 있지만, 여자부에 참가하려는 트랜스여성의 경우에는 지난 4년 간 여성으로 살아왔어야 하고 참가 직전 12개월 동안과 경기 기간 동안의 혈청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10nmol/L 이하여야만 한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존재해왔던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선수의 역사를 살펴본 이유는 맥, 새라, 안드레아와 테리의 사례가 결코 새로운 것도, 특이한 것도 아니고 근대 스포츠가 시작된 이래로 늘 논쟁적이었으며 스포츠 내 성별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관객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1) 경쟁을 하는 스포츠에서 성별의 구분은 공정함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맞는가?
2) 운동 능력에 있어, 여성의 신체는 남성의 신체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는 게 정당한가?
3) 스포츠는 반드시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여야만 가치 있는 것인가?
만약 이 영화를 본 당신이 이 세 가지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였다면, 우리는 성별 구분이 아예 없는 스포츠를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제 스포츠 종목 중 성별 구분이 없는 승마, 요트 등 일부 하위 종목, 패럴림픽의 보치아 종목 같은 소수의 예외 사례에서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영역 전반에 걸쳐서 말이다.
준우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 단체 소개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는 트랜스젠더의 인권 향상과 젠더/다양성에 대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조각보라는 이름처럼, 트랜스젠더의 복잡다단한 삶이 얽히고 설키며, 성별정체성의 다양한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각양각색의 색들이 각자의 색깔을 갖되 또 함께 어우러지는 조각보를 한국 사회에 펼치기를 바라는 활동을 펼쳐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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