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가면놀이

인권해설

우리 모두는 당사자다-한국의 성문화를 바라보는 시선 여성에 대한 젠더 폭력이 심해지고 있다. 아니 적어도 ‘심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전자발찌나 화학적 거세 등 고강도 정책이 도입되어도 안전에 대해 일반 여성시민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여성 대통령이 약속한 4대 악 근절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성폭력과 학교폭력, 가정파괴범죄. 이 세 폭력이 분리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성폭력이란 약자에게 가해지는 권력과시용 폭력이 성애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이없어 벌어진 입 다물 틈도 없이 터져 나오는 공직자들의 성 관련 추행들을 보며 역시 정책(약속)을 가장 빨리 잊어버리고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정책을 ‘상품’으로 고안하고 파는 정치인들임을 확인한다. 그 약속이 성/폭력에 관한 것일 경우 망각이 폭력적으로 빠르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성폭력은 약자에 대한 권력과시 현장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약자는 여성이거나 (여성 중에서도 나이 어린 여성이나 장애 여성이 더 약자라 더 빈번히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부하거나 (군대), 적이거나 (갈등 지역), 원생이거나 (보육원) 등등 계속 나열될 수 있다. 생물학적 성이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폭력의 대상은 늘 여성화되기 때문이다. 성애화된 폭력에 끊임없이 자양분을 대주고 있는 권력과시욕은 자기 오인의 이면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혐오나 불안, 훼손된 자존감이 주는 쓰라림을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떨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중독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거의 쓰나미 수준으로 덮치고 있는 각종 성관련 추문들과 추행들은 신자유주의 위험사회의 불안과 경쟁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생의 의미, 그리고 지속적인 관계의 불가능성이 어떤 방식으로 젠더화된 폭력을 증폭시키는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강고한 가부장제를 배경으로 한 일들이다. 어떤 왜곡된 자아를 길러내는가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그것의 결과인 자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야말로 가부장제 유산 상속자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적어도 관계에 뿌리내린 의미 있는 공존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에 기생해 위협받는 자존감을 보상받으려는 남성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일베의 여성혐오를 보라), 같잖은 자본과 지위가 부추긴 자기오인과 오만에 힘입어 자기가 하는 모든 잘못된 입놀림과 손놀림, 몸놀림을 타인에 대한 ‘위로’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일그러진 성문화. 자본주의와 군사문화, 가부장제의 담합 속에서 잘못된 길로 계속 내달린 한국 사회 성문화를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제, 그만! 나는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겠어!’ 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특히 남성시민들의 모임은 언제 구성될 것인가. 문정현 감독의 <가면놀이>는 이 일그러진 성문화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잘못된 성문화의 피해자들, 즉 성폭력 당사자들과 그 어머니들의 ‘말 못하는 고통’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 ‘일그러진 성문화 재생산자들’의 자기방기적 뻔뻔함과 함께 화면을 이어간다. 여기 수치심을 껴안고 자기혐오의 침묵 속에서 차갑게 응고되는 사람들이 있다. 상처나 고통조차도 자신의 경험으로 품을 수 없어서 가면놀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성폭력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 성문화의 맨얼굴이다. 하긴 메이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창피하다고,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으니 맨얼굴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겠다. 성폭력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당사자다. 우리 모두 연루되어 있다. 잠재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가해와 피해라는 말이 너무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면 ‘편안하고 안온한 관계’, ‘상대방의 개별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마음 쓰는 관계’의 가능 혹은 불가능이라는 말은 어떤가? 우리 모두 언제부턴가 이런 관계는 자본이 매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가면놀이>를 보며 당사자성을 환기하자, 그 심정으로 일상의 성문화 조금이라도, 그래 조금이라도 바꾸자. 김영옥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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