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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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 상황은, “이방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코로나19라는 ‘적’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우리’에, 한국에서 거주하고 일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포함되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우한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었고, 이주민들은 초기에 공적 마스크를 살 수조차 없었다. 영주권자가 아닌 경우에는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주민들이 모국어로 된 보건 및 방역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무엇을 특별히 ‘바꾼’ 것은 아니다. 어느 이주노동자들은 원래부터도 거주지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비닐하우스에 살았고, 한국인 노동자들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일상적으로 요구받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채로 살아왔다. 코로나19 위기는 그 모든 차별에 또다시 새롭고도 서러운 차별들을 덧대었을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 ‘지금’, ‘이곳’을 떠나야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세계 속에서 ‘나’의 장소는 어디일까? 한국인의 아메리칸 드림, 혹은 서구에 대한 선망은 어떤 식의 응답을 받아왔나? <야간근무>에서 공장장은 한국인 노동자 연희와 이주노동자 린을 나란히 두고 “열심히 하면 연희에게는 관리자 직급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옆에서 ‘남의 떡’일 뿐인 기회에 관해 듣고만 있어야 하는 린은 마치 투명인간 같다. 하지만 연희는 린처럼 한국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할 수 없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려 한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캐나다로, 프랑스로의 이주를 꿈꾸는 여느 한국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호주에서도, ‘이방인’으로서 연희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다. ‘호주 괴담’을 우려스럽게 전하는 연희 어머니의 표정은 심상찮다.

코로나19를 통해 유럽 각국에서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아시아인에 대한 적대와 테러를 보라. 어느 사회에나 ‘우리’라는 관념이 존재하고, 바깥의 존재들은 ‘우리의 몫’을 빼앗거나 위협하는 존재로 쉽게 간주되면서 그 입구를 뚫지 못한다. 헌데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매일매일의 상호작용이다. 개별의 삶이 구체적으로 상상되지 못하고 이방인(Stranger)이라는 납작한 이름만이 남을 때, 그들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주민들이 가족과 고향에 대해 품는 그리움, 교육에 대해 갖는 열망, 우정에의 희망, 그 모든 ‘서사’가 뒤로 밀려날 때, 이주민은 그저 투명인간으로 남겨진다.

분명 ‘우리’의 원을 더 넓혀가려는 시도들은 존재한다. 가령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이주자와 난민에게 일괄적으로 임시 시민권의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 모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방역이라는 목표를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이주자와 난민들에게 ‘지금-여기에 속해있다’는 안전한 느낌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공동체의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또 어쩌면 누적되는 피로와 불안이 ‘치안’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그들은 영리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당신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 ‘조건부 환대’로, 아직은 옆의 존재에게 완전한 곁을 내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들은 손을 내밀었고, 그로부터 우정과 연대의 가능성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볼까? 아직도 공적 마스크조차 살 수 없는, ‘미등록’된, ‘불법’의 존재들은 그렇게 ‘이기적인 조건부 환대’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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