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토요일 15시 녹사평역 인근의 이태원 광장에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TDOR)을 맞아 트랜스젠더 추모 집회 및 행진 <단결트젠, 용산은 젠더땅>이 진행되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기획단’이 주관하고 46개의 연대 단위가 공동 주최로 함께 했으며 서울인권영화제 역시 공동 주최 단위로 행사에 참여했다. 드레스 코드가 <따듯하게>였던 만큼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얼음장 같은 바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듯 불었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고 이태원 광장으로 향했다.
<단결트젠, 용산을 젠더땅>은 소천하신 임보라 목사를 위한 묵념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이후 연대 발언과 공연이 이어졌다. 희생된 동료를 추모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마음을 다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문애린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불쌍해서, 약해서가 아니라 주체이기 때문에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살아가고 인정받는 건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소수자의 삶을 관통하는 발언이었다. 우리는 배려와 시혜가 아니라 평등과 권리를 요구한다.
행진은 전쟁 박물관을 찍고 차도를 역 중행 하여 돌아오는 루트로 진행되었다. 원래는 전쟁 박물관을 지나쳐 집무실 쪽으로 돌아 광장으로 돌아오는 루트로 행진하려고 했었으나 경찰 측이 “추모 집회면서 왜 집무실 쪽으로 행진을 하느냐, 추모집회의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라며 제지했다고 한다. 누가 들으면 대통령께서 태초부터 용산에 자리하신 줄 알겠다. 문득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떠오른다. 단절된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눈물만 인정하겠다는 저들의 사고방식이다. 존재하되 숨죽이고 추모하되 입은 닫으라는 억압의 메시지다.
그러나 우리의 추모는 애환이자 축제고 돌봄이자 투쟁이다. 우리는 흘려내고, 말하고, 두드리고, 애도하여 세상을 바꾼다. 이분법의 벽을 깨부수고 당신들 옆에 존재하며 젠더 규범을 교란한다. 애도가 행진으로, 투쟁으로, 정치적 제언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정치적이면서 일상적이다. 성별정정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모두의 확장실을 만든다. 때마다 모여 식사를 하고 공연을 본다. 병원을 가고 집회에 나가며 춤도 배운다. 대낮에 용산 한복판에서 드랙 퍼포먼스도 본다. 추운 날씨에도 무대를 쓸고 다니는 아티스트를 보며 손이 아릴 것 같다는 걱정을 하다가도 공연이 절정에 다다르면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정상 세계를 무너뜨리고자 하지만 세계의 침입자는 아니다. 우리는 항상 이곳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용산에 있고 이태원에 있고 한국에 있다. ‘단결트젠! 용산은 젠더땅!’ 구호를 외칠 때마다 마음이 단단해졌다. 무대에서 발언한 모든 활동가와 무대 아래 있던 모든 참가자, 광장 한쪽에서 보늬 밤을 판매하던 사람들과 깃발을 올린 사람들, 추위로 발을 동동 구르던 친구와 공연에 맞춰 춤추는 동료의 얼굴이 보였다. 이들과 함께 따듯한 겨울을 보내고 푸른 봄을 맞이하며 일상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이며 살아간다. 허리케인 김치 님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트랜스젠더는 스톤월 항쟁의 영웅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영웅들”이다. 트랜스젠더와 앨라이, 이 시간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일상의 영웅”이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데 외롭지 않고 내일을 꿈꿀 수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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